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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사랑의 작동방식

나는 성과 사랑의 관계성을 고전의 차용과 재해석을 통해 상징적 서사로 재구성함으로써 ‘억압받지 않는 성’과 ‘예속되지 않는 사랑’의 세계를 탐구하려 한다. 성은 대개 육체적이며 저속한 배설의 욕망으로 치부되는 반면, 사랑은 언제나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게다가 성이 타락하면 할수록 오히려 사랑의 의미는 격상 되곤 했다. 이렇듯 성과 사랑의 관계에서 언제나 우위는 사랑의 차지였다. 그런데 왜 우리는 저속한 성이라며 한껏 숨기고 감추려 하면서도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성에 대해 궁금해 하고 드러내고자 했을까? 과연 성은 더러운 것이며, 사랑은 깨끗한 것일까? 왜 우리는 성과 사랑을 분리하여 생각하려 할까? 나의 작업은 성과 사랑의 관계에 대한 탐구를 위해 동서양의 고전을 새로운 상징과 해석으로 드러내고, 이를 제단화의 형식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마치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숨겨진 역사의 수수께끼를 찾아내려 하는 고고학자와 같이, 나는 고전으로부터 성과 사랑의 관계와 단서를 찾아내려한다. 푸코는 『성의 역사(L'Histoire de la sexualité)』에서 역사 속에서 여러 사건 발생을 근거로 문제가 되는 것은 성이 아니라 성의 담론이며, 이러한 담론은 전략적으로 이용되어 왔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성의 의미와 가치는 역사 안에서 담론을 따라 이동하거나 변형되는 것일 뿐 고정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성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언제나 골칫덩이로만 치부되어왔던 억압된 성을 해방시키는 것과 같았다. 이를테면, 나의 작화 태도는 이러한 푸코적 연구방법을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고전의 신화 속에서 성과 사랑은 자유분방하다. 신과 동물과 인간은 성과 사랑 안에서 교류하고 내통한다. 본디 성과 사랑은 경계가 없었다. 그러나 신에 대한 사랑을 교리로 삼는 종교에서는 오히려 성을 사랑에서 분리시키고 이를 다스리기 위해 성을 죄악시 했다. 이로 인해, 성과 사랑의 세계는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었다. 나는 이러한 이분법적 경계가 가장 극명하게 펼쳐지는 종교화의 형식을 차용함으로써 오히려 경계 없는 자유를 지닌 고전의 신화나 설화를 작품 안으로 끌어들인다. 성과 사랑의 관계에 대한 이분법적이고 대치적인 가치체계의 혼란이 때로는 종교화로 때로는 신화의 형식으로 교차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대표작품 〈The gate of love〉는 성과 사랑이 분리되지 않은 세계를 고전의 신화적 상상을 바탕으로 제단화의 공간구성을 차용하여 나타낸 것이다. 이 세계에서 성과 사랑은 어디든 담길 수 있고, 흐를 수 있는 물과 같은 것으로 이야기를 따라 흐른다. 천국과 지옥의 양상을 띠는 것은 곧 신 중심의 선악의 구분이 아니라 사랑을 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 안에서 구별된다. 사랑하는 연인이 만나고 헤어지는 그 모든 일련의 이야기들은 이 세계 안에서 무한히 돌고 돈다. 단지 사랑의 감정이 상승되고 하강하는 것처럼, 마치 빗물이 모여 강을 이루고, 강에서 증발한 물이 구름이 되고 다시 비가 되어 쏟아지는 것과 같다. 〈The gate of love〉가 이원적인 사랑의 세계가 순환하면서 결국엔 사랑의 밝은 면을 드러내고 있다면,〈서서히 드러나는 꿈〉과 〈Spelunkers〉는 사랑의 어두운 면을 드러낸다. 이 작품들은 여전히 어둡고 감춰진 성의 세계 속에서 쾌락의 즐거움과 사랑에 수반되는 미움의 감정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과 고민이 담겨있다. 특히, 〈서서히 드러나는 꿈〉은 히에로니무스 보쉬(Hieronymus Bosch, 1450~1516)의 〈쾌락의 정원(The Garden of Earthly Delight)〉을 오마주 한 것인데, 이 작품은 초기에는 종교적 교훈을 담아낸 작품으로 평가되기도 하였으나, 후에는 잃어버린 낙원의 전경을 나타낸 것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제단화인 이 작품은 종교적 사유 안에서 성의 쾌락과 사랑의 오묘하고 복잡한 경계를 드러냈다는 점에서 나의 고민과 일맥상통한다. 그런데 〈쾌락의 정원〉에서는 절대자인 하느님이 등장하지 않지만, 〈서서히 드러나는 꿈〉이나 〈The gate of love〉에서는 세계의 주재자가 등장한다. 돼지의 얼굴을 하고 있고, 용의 몸통인 이 주재자는 고전 설화 속 영물들에서 착안하여 만들어진 피조물인데, 마치 프로이트(Freud, Sigmund , 1856~1939)가 말하는 초자아처럼 세계를 통치하고 지켜본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힘’처럼, 주체 스스로 만들어낸 제어 장치와 같다. 이것은 성과 사랑의 관념적 경계 안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스스로의 한계성을 드러내는 상징과도 같다. 반면, 〈Spelunkers〉에서는 주재자는 사라지고 ‘버섯처럼 피어난 눈(eyes)'만이 남았다. 감시하고 관망하는 듯 한 이 눈들은 주재자만큼의 힘은 없지만, 여전히 세계 곳곳에  남아있다. 그러나 동굴 속에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는 아마추어 동굴탐험가(spelunkers)들은 '눈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다. 그들은 성의 유희에 대한 아무런 죄책감과 거리낌도 없어 보인다. 그저 이들은 동굴을 탐험하는 것이 즐겁기만 하다. 마치 애초에 성이라는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랑과 성의 경계를 보기 좋게 허물어버린다. 이처럼 나의 작업은 성과 사랑의 궁금증을 시작으로 성과 사랑의 정의와 관계성을 고전의 신화나 종교화를 차용하여 그 의미를 답습하거나 재해석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나는 옛 이야기와 그림들을 통해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쩌면 같은 고민들을 해왔다고 생각한다. 성과 사랑 역시 마찬가지이다. 전 인류를 통틀어 사랑과 성만큼 인간의 삶과 긴밀한 것은 없다. 그러나 성과 사랑의 정의는 확고한 한가지로 정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과 사랑은 결국 개별 주체들의 인생경계(人生境界)에 따라 끊임없이 가치 체계가 변화하고 그 변화에 따라 각자의 리듬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변하지 않는 ‘성과 사랑의 정의’는 존재 할 수 없다. 성과 사랑의 관계는 각각의 세계 안에서 개별적이며 주관적인 방식으로 생성되고 소멸된다. 그리고 그 각각의 세계 안에는 각각의 주재자와 주체가 있을 따름이다. 나는 결국 성과 사랑을 탐구하고 정의하려 했다기보다는 그동안 나의 성과 사랑의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고 즐겨왔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성과 사랑의 줄다리기 속에서 나의 역사를 만들어나가는 일은 성의 죄의식에서 해방됨을 의미했고, 고결한 사랑을 일상으로 맞이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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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에 관한 이야기

나의 일상은 종교를 지니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모범적인 학생이었다. 그러나 사랑의 감정은 나의 일상을 요동치게 하였다. 사랑의 감정은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다양한 감정을 일으켰고, 내 안의 다른 나를 발견하게 했다.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환희와 절망, 기쁨과 아픔이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삶은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흥미롭고 매력적인 세계로 변하였다. 그러나 사랑의 감정은 현실에서는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었다. 하얀 눈이 길가에 내려앉은 순간, 잿빛으로 녹아버리듯이 내 사랑의 감정은 광활한 들판에 내던져진 채로 끊임없는 사건사고에 휘말렸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모두 내 자신이 되는. ‘왜 사람은 끊임없이 성에 호기심을 가지고 왔음에도 개인적인 경험을 고백하고 발설하는 것은 금기시할까? 우리는 꼭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부부의 연을 맺어야 할까? 첫경험에 호기심을 가지면서도 그러한 호기심이 공공연히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할까? 정신적 사랑은 범죄가 되지 않으면서, 육체적 관계는 범죄가 될까?’ 그러한 무수한 의문들은 나에게 성(性)과 관련된 작업을 하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게 하였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아름답지만, 치욕이라는 이름으로 조롱 당하고 버려지기 쉬운 인간의 성(性), 이 아름답고 상처받기 쉬운 성은 사회와 문화 속에서 구속 받고 평가 당한다. 나는 사회의 약속과 도덕, 문화 등의 형성이 모두 성의 거대한 역사 속에 녹아있다고 생각한다. 낭만적인 연애도, 기성세대와 사회에 대한 반항심도, 권력의 서열다툼도 모두 그 안에 있었으며, 일상적인 사생활에까지도 은밀히 분출되었다. 2012년 이번 전시 [a tale of dragon]은 인간이 규정한 사회와 문화 속에서 문제와 혼란을 야기시키는 성과 나약한 인간의 갈등을 [처용설화]를 바탕으로 풀어낸 것이다. 처용은 바람난 아내를 보았는데도 불구하고, 화내거나 괴로워하지 않고 가무(歌舞)로 그러한 상황을 처리하고 있다. 처용의 가무를 관대함을 지닌 사람의 사랑과 호방함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과연 처용의 행위가 성인군자의 아량에서 나온 것일까? 내가 사랑하고 믿었던 사람이 다른 사람과 잠자리를 하고 있는 장면을 눈앞에서 목격했을 때, 춤추고 노래 부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사람이나 될까? 인간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사회·문화적 특수성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수많은 규율을 정하고, 지키기를 스스로 감시한다. 동물적인 본능과 인간적인 이성의 갈등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본능을 이야기할 때, 성의 에너지만큼 강력한 것은 없다. 게다가 성은 동물적으로만 이야기하기에는 너무도 인간적이다. 사랑이라는 복잡·예민한 감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처용은 인간사회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인물이다. 처용의 행위 또한 이해되기 어렵다. 그래서 나는 처용을 순수한 에너지로 보았다. 처용의 순수한 에너지는 인간 사회에서 어떤 작용을 할까? 이 궁금증을 시작으로 3년 동안, 설화 속의 각각의 인물들을 바라보는 관점을 변화·이동시켜 가며 작업했다. 작품 속에서 용은 연꽃이 흐드러진 연못을 헤집고 다닌다. 불교에서 연꽃은 깨달음을 상징한다. 제 꽃잎에는 조금의 더러움도 묻히지 않은 채, 스스로의 몸에서 피고 진다. 그런데 연꽃은 더럽고 축축한 진흙더미에서 핀다. 이 진흙더미로 용이 내려온다. 그리고 전혀 심각하지 않은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여러 상황을 맞이한다. 사실, 성에서 비롯된 여러 문제들이 심각하고 무거워진 것은 인간만의 우월함에서 나온 것 같다. 성의 욕망과 본능은 얼마든지 인간의 이성적 의지로 제어하거나 컨트롤할 수 있다고 믿는 막연한 자신감, 그 자체가 실은 블랙코미디인 것이다. 용은 언제나 그대로 인데, 어느 연못으로 가느냐에 따라 소소하게 혹은 권위적으로 변한다. 그러니 용이 ‘가랑이가 네 개’인 것을 보고 성질이 나서 미쳐 날뛰었는지, 용서하기 위해 스스로 명상하며 치유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놀다 들어온 길에 술 취해 비틀거린 것인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오히려 그 모습을 보는 관찰자들이 심각하다. 그리고는 우아하고 교양 있는 방법으로 결론 내리려 한다. 용이 모든 것을 용서했고, 역신은 도망갔으며, 부인은 아무 잘못 없다고 말이다. 우리는 왜 이렇게 성의 문제에 대해 감추고 포장하려 할까? 사회는 왜 성적 에너지를 자꾸만 억압하고 구속하려 하는가? 정말로 우리의 본능과 순수한 에너지가 우리가 뜻하는 바대로 관리 될 수 있는 것인가? 나는 앞으로도 성의 문제를 연못의 진흙탕 같이 바라보는 사회의 제 문제들을 들여다볼 것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때로는 매우 심각하게, 또 때로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웃으면서 수많은 질문들을 내 앞에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답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 아마도 나의 작업이 될 것이다. A tale of (something) by A-bin Koh It is not with the aim of inciting people to speak of sex that it is made to mirror, at the outer limit of every actual discourse, something akin to a secret whose discovery is imperative, a thing abusively reduced to silence, and at the same time difficult and necessary, dangerous and precious to divulge? - Michel Foucault, "History of Sexuality: The Will to Knowledge" As a routine: I used to be a regular kind of gal with faith in God and a normal student life. But one thing had changed it all—the feeling of love. The feeling of love gave rise to all kinds of emotions that I had never felt before, and all the unprecedented emotions gave me a chance to reflect on myself and find a new "me". Without notice, uncontrollable delight and despair, joy and pain came about my routine. A sudden alteration in my life occurred, and all began to be perceived more attractive and interesting. But it is not a wonderful thing, the feeling of love, in reality; rather, it gave birth to inevitable turmoils and twists as if white snowfall immediately turns black after touching the earth. My feeling of love was one of those left abandoned on a barren land: the assailant and the victim, all at once. 'Why do we let ourselves forbid from revealing and confessing our personal experiences about sex, while we never stop having interest in it? Should we really commit ourselves to only one person, and then engage in matrimony? Why do we, show immense interest on the 'first time' (of others and ours), yet fear its uncovering to the others? Why then, the imagination isn't a crime, when the physical act can be? These questions—and countless more—have become the central focus of my work: sex. Sex: beautiful as it is carefully caressed in the name of love; ridiculed under its properties of disgrace; l'amore, fragile and beautiful, has constantly been assessed and confined in discourses within our culture and society. Indeed, I believe the society roots itself of its promises, ethics, culture, etc., all in the epic of sexuality. Whether it be a romantic love story, resistance against the social norms and the pre-conceived, power plays and rank challenging, it all finds itself based on sexuality, let alone our everyday lives. This exhibition, which I've titled "A Tale of Dragon", is my own interpretation of the Korean folk fable "Chu-yong-seul-hwa", in which one may observe chaos and problematic of sexuality and conflict of mankind within a society and culture regulated by man. The protagonist, Chu-yong, despite witnessing a sexual affair of his wife, he does not push himself to anger or agony. Instead, he sings and dances away his dilemma. A common observation of such act makes him magnanimous, as being extremely tolerant and thus an icon of leniency. But is it really so? Does his act of tolerance genuinely sprout from magnanimity that only saints may possess? How many people would actually dance and sing after witnessing their loved ones having a sexual affair? Throughout history (and in some cases traditionally), mankind has self-censored their thoughts and acts under a set of rules that they have imposed on themselves. Instinct and rationality come in to play here. But when speaking about instincts, nothing surpasses sexuality. Moreover, the sexuality I speak about does not confine itself to our nature as animals; rather, it is humane because of the complexity and sensibility that underscore its existence. In that aspect, Chu-yong is a character that can only be possible in a fiction. Furthermore, his actions cannot possibly be understood. Thus, it was reasonable for me to see him as an energy, rather than a being. How does the pure energy of Chu-yong act within the real world? This very question has guided me for the last three years to delve into each character of the fable, standing from their perspectives, moving myself as an omniscient being from one to another. In A tale of dragon _scene #1, the dragon—Chu-yong—roams through a pond of lotuses. In Buddhism, lotus symbolizes enlightenment. Without any imperfections to the petals its flower, the lotus silently blooms and dies. But lotuses bloom upon mud: the dirty, and damp state of earth. And the dragon descends to this clamminess. And without any seriousness whatsoever, it encounters various situations as it roams about. Frankly, most 'problems' that arises out of sexuality have become grave or severe due to the superiority of mankind. The vague confidence in which human beings believe that they are capable of controlling their sexual desires or instincts by own will itself is a black comedy. The properties of the dragon remain the same; however, they alter slightly, in accordance to the pond the dragon descends on, trivial or prescriptive. Therefore, it is impossible to find out if the dragon has lost its reason after seeing 'four legs', or healed itself to pardon by meditation, or, stumbled upon the scene after coming home drunk. Nonetheless, the observers are serious. And they try their best to conclude in the most elegant, sophisticated ways. The dragon has already forgiven, the incubus fled, and the wife had made no mistake. Why do we, as the observers did, try to conceal and roundabout the problematic of sexuality? Why does the society repress and confine sexual energy? Is it really possible to control our instincts and pure energy as we please? Declaration: I will continue to explore the ritualistic, prejudiced views of our society on sexuality. I'll definitely be facing questions that I may not understand, however, by being serious sometimes, and being carefree the other, I would be able to answer them in my own ways. And my works to come will reflect the questions and answers I find on the 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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