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Bin Koh

아이보개BLUE(S)
그 날은 평범했던 어느 날처럼, 우유를 양껏 먹인 아기를 태우고 낮잠을 재우기 위해 유모차를 끌고 산책에 나선 날이었다. 모두들 출근하고 없는 그 고요하고 무료한 시간에 나는 그저 멍하 니 한 까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얗고 검은 털을 가진 줄만 알았던 그 까치는 총총거리며 걷는 듯 하더니, 이내 내 앞에서 푸드덕하며 날아올랐다. 까치가 불현듯 나래를 활짝 핀 그 순간! 나 는 검은 깃털 속에서 총천연색의 푸르름과 해방감을 보았다. 나는 까치의 검은 털을 그저 검다고만 생각했던가? 어쩌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 서도 무심히 넘겨온 그 평범한 상식이 나를 또 다른 경계로 이끌었다. 완전히 다른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아니면 명확히 규정된 정체성이라는 것이 있나? 우리는 서로 다르다고 여기는 것들 사이에서도 경계와 교차 지점을 반드시 만나게 되고, 다름을 규정하는 관념과 개념은 개인의 경 험과 시대적 맥락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며 새로운 변곡점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그저 서로 다른 관계항의 경계선을 스치듯 지나갈 뿐이다. 그 날의 개인적 경험이 담긴 는 황병기의 가야금 춤곡 ‘아이보개’를 듣 고 제목을 붙였다. 아이보개는 ‘애보개’의 본말로 ‘아이를 돌보는 사람’이라는 우리말이다. 곡은 아이보개가 그저 아이처럼 놀고 싶어 하는 천진난만한 아이일 뿐이라는 듯 경쾌한 선율이지만, 기저에는 어쩔 수 없는 애달픔이 서려 있다. 이 곡을 듣고 아이를 낳고 기르는 초보 엄마인 나 를 떠올렸고, 양가적인 엄마의 마음을 까치와 고무장갑을 낀 손이라는 상징적 소재로 드러냈다. 한편, 기존의 작업과는 다른 조형적 양상과 특징을 보이는 이 작품은 ‘경계’에 대한 물음을 그림자와 장황(裝潢)이라는 장치로 제기하고 있다. 작품 안의 그림자와 작품 밖의 그림자를 병치 하는 설치는 그림의 안과 밖의 경계를 흐트러트린다. 또, 그림을 꾸미는 장황의 요소가 회화의 화면으로 넘어와 그림의 영역으로 자리 잡았다. 나는 회화의 자리에 비회화적 요소를 허용함으 로써 이들의 경계를 허물어보고 싶었다. 사랑에 대한 지난 작업들이 이원화된 사랑 개념의 상의 성(相依性)을 풀어내고자 했다면, 는 정체성의 경계, 회화와 공예(장황), 2차원 의 3차원성 등의 화두를 떠올리며, 앞으로 ‘경계 시리즈’의 시작을 알린다. 은 공예와 회화, 전통과 현대(드로잉)의 공존과 조화를 보다 적극적으로 실 험한 작품이다. 이 작업에서 처음 시도된 오일 드로잉(oil transfer drawing)은 전통 회화와 현 재를 잇는 하나의 매개로 작용한다. 과거 드로잉은 회화의 초기 단계나 연습 과정으로 여겨져 독립된 작품으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현대에 와서는 실험성·독창성·미완성의 열린 결말을 내포한 다는 개념적 측면에서 하나의 작품으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동시대 미술에서 ‘개념 그 자체’가 작품이 되는 경우, 드로잉 혹은 드로잉적 특성은 작가의 의도와 사고를 드러내는 중요한 장치가 된다. 그러나 전통회화와 드로잉의 관계는 단순하지 않다. 수묵화에서는 응축된 획과 선의 흐름 이 곧 완성된 화면을 이루기 때문에, 밑그림이나 준비선을 두는 서양식 드로잉 개념이 성립하지 않았다. 반면 채색화의 하도(下圖)는 밑그림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작업의 처음부터 끝까 지 계획된 형태와 정밀한 완결성을 요구한다. 하지만 오늘날의 드로잉은 예측 불가능함, 우연성, 미완성의 개방성에서 오히려 그 가치를 찾는다. 따라서 나에게 드로잉의 도입은 과거의 나로부 터 이어져 온 단단한 관성과 습관을 흩트리고 깨뜨리는, 보다 유연한 태도를 의미한다. 또한, 내가 주로 사용했던 채색법 중에는, 입자가 굵은 안료가 본연의 색을 단단히 유지하도록 하면서도 자연스러운 그라데이션을 만들기 위해 —마치 해칭(hatching) 기법처럼— 색선을 하나 하나 그어 나가는 방식이 있었다. 나는 이 채색법이 일견 전통자수의 수법(繡法)과 유사한 시각 적 효과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 후, 전통자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자수장께 찾아가 몇 개월 간 자수를 배우기도 했다. 하워드 리사티(Haward Risatti)는 『공예란 무엇인가』에서 공예라는 말의 기원은 공예가가 특정 재료와 기술에 반드시 통달해야 함을 암시하며, 재료와 기술은 공예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은 전통 회화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전통 회화의 범주 안에서 화가는 오랜 시간 ‘그림 그리는 장인’, 즉 화공(畫工)으로 불렸다. 회화의 장르는 어쩌면 필연적으로 공예와 맞닿아 있다. 나는 전통 공예인 자수와 전통의 회화를 하나의 화면에 두고 전통의 범주 안에서 회화와 공예의 경계에 대해 묻고 싶었다. (중간생략) , 은 “고요함 속에 움직임이 있고, 움직임 속에 고요함이 있 다.”라는 말에서 착안한 것이다. 작품 속 달항아리는 물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담겨있고, 물 에 비치는 까치의 환영과 그림자가 없는 까치는 진짜 실재인지 알 수 없다. 나는 이를 통해 실 재와 환영의 교차지점 혹은 무엇이 실재인지 환영인지 모를 인지적 혼란을 미적 허용을 통해 표현해 보고 싶었다. 또한, 은 회화에 공예적 작업 방식을 적용해 본 것이다. 도자기 를 빚을 때는 물레질을 반복하고 가마에 굽는다. 나는 이 작업에서 달항아리를 그리는 것이 아 니라 빚는다는 생각으로 여러 종류의 백색 안료를 수차례 덧칠하고 사포에 갈아내는 작업을 반 복하며 그려내었다. 이 작업은 공예적인 작업 방식을 회화에 적용해 봄으로써 회화와 공예의 정의와 그 범위에 대해 되묻고자 한 것이다. 이번 전시는 예술과 삶, 전통과 현대, 회화와 공예처럼 서로 다른 세계들이 맞닿는 경계 위에서 이루어진 탐색의 기록이다. 나는 이 작업들을 통해 경계를 단순히 드러내고 그저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생겨나는 틈과 여백이 어떤 새로운 감각과 의미를 만들어내는지 주목하고자 했다. 경계는 종종 제한으로 여겨지지만, 때로는 서로를 변화시키고 확장하는 생성의 자리이기 도 하다. 출산과 육아라는 값진 경험 뒤에 짧은 휴지기를 지나 다시 시작된 이번 작업들은 이러 한 문제의식을 구체적으로 실험한 첫 단계이며, 앞으로 이어질 ‘경계 시리즈’의 방향을 제시하 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만약 관람자가 각자의 삶에서 나와 유사한 경계의 순간을 마주하고 있 다면, 이번 전시가 그 경계를 바라보는 시선을 조금이나마 흔들고, 위로하고, 작은 틈새의 폭을 열어주는 경험을 선사하길 바래본다. 고아빈, 2025년 12월 ◆

성과 사랑의 작동방식
‘사랑’은 무엇인가? 사랑의 순수를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사랑을 이야기할 때, 성과 사랑의 관계를 끊임없이 되묻는다. 나는 이러한 성과 사랑의 관계성을 고전의 차용과 재해석을 통해 상징적 서사로 재구성함으로써, 억압되지 않은 성과 억압받지 않는 사랑의 세계를 탐구하려 한다. 성과 사랑의 작동방식 : 즐거운 나의 정원 “지금 사랑하고 있지 않는 자, 모두 유죄”라고 했던가. 사랑을 했던, 사랑받지 못했던, 우리는 사랑이라는 촌스럽고도 유치한 골칫덩이와 운명을 함께 한다. 나는 언제나 사랑이 궁금했고, 고팠다. 이성에 눈을 뜬 시점부터 사랑을 알고 싶은 그 마음은 점점 더 커져갔다. 한 사람을 궁금해하고 함께 하고 싶은 그 마음은, 몸과 마음을 오롯이 바쳐 송두리째 삶의 가장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언제나, 성적 욕망이었다. 모태 천주교 신자였던 나는 사춘기가 올 무렵 순결서약을 했다. 내가 경험한 작은 세계 안에서 사랑은 성적 욕망과는 함께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랑의 열망이 그 서약을 깨는 순간 나에게는 엄청난 혼란이 일어났다. ‘성은 죄악일까? 과연, 성과 사랑은 함께 할 수 없는 것인가?’ 성은 때로 육체적이며 저속한 배설의 욕망으로 치부되곤 한다. 반면, 사랑은 종교적 의미 안에서의 사랑을 제외하고서도 언제나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성과 사랑에 대한 이중적인 대치구조 속에서 성이 타락하면 할수록 오히려 사랑의 의미는 격상 되곤 했다. 사랑은 플라톤의 이데아 만큼이나 단단하고 고결해졌다. 이렇듯 성과 사랑의 관계에서 언제나 우위는 사랑의 차지였다. 그런데 왜 우리는 저속한 성이라며 한껏 숨기고 감추려 하면서도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성에 대해 궁금해하고 알고 싶어했을까? 과연 성은 더러운 것이며, 사랑은 깨끗한 것일까? 성과 사랑의 이분법적 잣대는 누가, 왜 만들어낸 것일까? 왜 우리는 성과 사랑을 분리하여 생각하려 할까? 나의 작업은 성과 사랑의 관계에 대한 탐구를 위해 동서양의 고전을 새로운 상징과 해석으로 드러내고, 이를 제단화의 형식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이것은 고전으로부터 성과 사랑의 관계와 단서를 찾아내려하는 의지를 보여준다. 마치 인간사를 탐구하며,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숨겨진 역사의 수수께끼를 찾아내려 하는 고고학자와 같이 말이다. ‘성의 역사’에서 푸코는 역사 속에서 여러 사건 발생을 근거로, 문제가 되는 것은 성이 아니라 성의 담론이며, 이러한 담론은 전략적이라고 했다. 그에 의하면, 성의 의미와 가치는 역사 안에서 담론을 따라 이동하거나 변형되는 것일 뿐 고정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성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언제나 골칫덩이로만 치부되어왔던 성을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푸고 덕분에 성은, 성이 가지고 있던 불명예의 굴레를 벗어 던질 수 있었다. 이를테면, 나의 작화 태도는 이러한 푸코적 연구방법을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고전의 신화 속에서 성과 사랑은 자유분방하다. 신과 동물과 인간은 성과 사랑 안에서 교류하고 내통한다. 본디 성과 사랑은 경계가 없다. 그런데 종교는 어떠한가? 사랑을 교리로 삼는 종교에서는 오히려 성을 사랑에서 분리시키고, 다스리려 했다. 고귀한 사랑은 하늘로 올라가고, 세계는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었다. 종교화는 천국과 지옥의 생생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비로소 우리에게 성과 사랑을 분리하여 생각하게 했다. 나는 이러한 이분법적 경계가 가장 극명하게 펼쳐지는 종교화의 형식을 차용함으로써 오히려 경계없는 자유를 지닌 고전의 신화나 설화를 작품 안으로 끌어들인다. 성과 사랑의 관계에 대한 이분법적이고 대치적인 가치체계의 혼란이 때로는 종교화로 때로는 신화의 형식으로 교차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대표작품 ‘The gate of love’는 성과 사랑이 분리되지 않은 세계를 고전의 신화적 상상을 바탕으로 제단화의 공간구성을 차용하여 나타낸 것이다. 이 세계에서 성과 사랑은 어디든 담길 수 이고, 흐를 수 있는 물과 같은 것으로 이야기를 따라 흐른다. 천국과 지옥의 양상을 띄는 것은 곧, 신 중심의 선악의 구분이 아니라 사랑을 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 안에서 구별된다. 사랑하는 연인이 만나고 헤어지는 그 모든 일련의 이야기들은 이 세계 안에서 무한히 돌고 돈다. 단지 사랑의 감정이 상승되고 하강하는 것처럼, 마치 빗물이 모여 강을 이루고, 강에서 증발한 물이 구름이 되고 다시 비가 되어 쏟아지는 것과 같다. ‘The gate of love’가 사랑의 겉면, 즉 당당히 드러낼 수 있는 밝은 면이라면, ‘서서히 드러나는 꿈’과 ‘Spelunkers’는 여전히 어둡고 감춰진 성의 세계 속에서 쾌락의 즐거움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과 고민이 담겨있다. 특히, ‘서서히 드러나는 꿈’은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쾌락의 정원’을 오마주한 것인데, ‘쾌락의 정원’은 초기에는 종교적 교훈을 담아낸 작품으로 평가되기도 하였으나, 후에는 잃어버린 낙원의 전경을 나타낸 것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제단화의 형식을 띈 이 작품은 종교적 사유 안에서 성의 쾌락과 사랑의 오묘하고 복잡한 경계를 드러냈다는 점에서 나의 고민과 일맥상통한다. 그런데 ‘쾌락의 정원’에서는 절대자인 하느님이 등장하지 않지만, 나의 작품 ‘서서히 드러나는 꿈’이나 ‘The gate of love’에서는 세계의 주재자가 등장한다. 돼지의 얼굴을 하고 있고, 용의 몸통인 이 주재자는 고전 설화 속 영물들에서 착안하여 만들어진 피조물인데, 마치 프로이트가 말하는 초자아처럼 세계를 통치하고 지켜본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힘처럼 존재하는 신이 아니라, 주체 스스로 만들어낸 제어 장치와 같다. 혹은, 프로이트의 ‘초자아’의 개념으로 봐도 무방하다. 이것은 마치, 성과 사랑의 관념적 경계 안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스스로의 한계성을 드러내는 듯하다. 반면, ‘Spelunkers’에서는 주재자는 사라지고 ‘버섯처럼 피어난 눈(eyes)’만이 남았다. 감시하고 관망하는 듯한 이 눈들은 주재자만큼의 힘은 없지만, 여전히 세계 곳곳에 남아있다. 그러나, 동굴 속 세계에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는 아마추어 동굴탐험가(spelunkers)들은 ‘눈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다. 그들은 성의 유희에 대한 아무런 죄책감과 거리낌도 없어보인다. 그저 이들은 동굴을 탐험하는 것이 즐겁기만 하다. 마치 애초에 성이라는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랑과 성의 경계를 보기 좋게 허물어버린다. ‘십이지色’ 시리즈는 순수한 욕망에 관한 것이다. 십이지신으로 대변되는 열 두 마리의 동물들은 누군가를 유혹하려 하거나 스스로의 욕망에 심취해 있다. 본디 십이지신은 호국적인 성격을 띄는 것이었으나, 이 시리즈에서는 열 두 가지 빛깔의 욕망에 대해 말하고 있다. 나는 욕망을 성과 사랑에 구분없이 인간의 본능 안에서 일어나는 순수성 그 자체로 본다. 그러나 이러한 욕망 역시 작은 공간 안에 갇혀있다. 그런데, 이들은 혼자일 때는 갇혀진 것이지만, 여럿이 모이면, 마치 책거리도와 같이 외부에 당당히 공개되고 자랑하듯 드러내지는 것이다. 이렇듯 나의 작품 안에서 욕망은 감추려 하는 의지와 드러내려고 하는 의지가 상충되고 교차되며 동시에 이루어진다. 이처럼 나의 작업은 성과 사랑의 궁금증을 시작으로 성과 사랑의 정의와 관계성을 고전의 신화나 종교화를 차용하여 그 의미를 답습하거나 재해석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나는 옛 이야기와 그림들을 통해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쩌면 같은 고민들을 해왔다고 생각한다. 성과 사랑 역시 마찬가지이다. 전 인류를 통틀어 사랑과 성만큼 인간의 삶과 긴밀한 것은 없다. 그러나 성과 사랑의 정의는 확고한 한가지로 정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과 사랑의 작동방식은 결국, 불연속적인 관계들로 연속성을 획득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각각의 사건들은 서로 관계를 맺으며 조금씩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이유로 하늘아래 같은 성과 사랑의 정의가 있을 수는 없다. 성과 사랑에 관한 프로토콜은 각각의 세계 안에서 개별적이며 주관적인 방식으로 생성되고 소멸되는 것일지 모른다. 그 각각의 세계 안에는 각각의 주재자와 주체가 있을 따름이다. 나는 결국, 성과 사랑을 탐구하고 정의하려 했다기 보다는 그동안 나의 정원을 깊이 들여다보고 즐겨왔다고 봐도 무방하다. 성과 사랑의 줄다리기 속에서 나의 정원을 가꾸는 일은 성의 죄의식에서 해방됨을 의미했고, 고결한 사랑을 일상으로 맞이하는 일이었다. ◆

(어떤 것)에 관한 이야기
나의 일상은 종교를 지니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모범적인 학생이었다. 그러나 사랑의 감정은 나의 일상을 요동치게 하였다. 사랑의 감정은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다양한 감정을 일으켰고, 내 안의 다른 나를 발견하게 했다.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환희와 절망, 기쁨과 아픔이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삶은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흥미롭고 매력적인 세계로 변하였다. 그러나 사랑의 감정은 현실에서는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었다. 하얀 눈이 길가에 내려앉은 순간, 잿빛으로 녹아버리듯이 내 사랑의 감정은 광활한 들판에 내던져진 채로 끊임없는 사건사고에 휘말렸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모두 내 자신이 되는. ‘왜 사람은 끊임없이 성에 호기심을 가지고 왔음에도 개인적인 경험을 고백하고 발설하는 것은 금기시할까? 우리는 꼭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부부의 연을 맺어야 할까? 첫경험에 호기심을 가지면서도 그러한 호기심이 공공연히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할까? 정신적 사랑은 범죄가 되지 않으면서, 육체적 관계는 범죄가 될까?’ 그러한 무수한 의문들은 나에게 성(性)과 관련된 작업을 하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게 하였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아름답지만, 치욕이라는 이름으로 조롱 당하고 버려지기 쉬운 인간의 성(性), 이 아름답고 상처받기 쉬운 성은 사회와 문화 속에서 구속 받고 평가 당한다. 나는 사회의 약속과 도덕, 문화 등의 형성이 모두 성의 거대한 역사 속에 녹아있다고 생각한다. 낭만적인 연애도, 기성세대와 사회에 대한 반항심도, 권력의 서열다툼도 모두 그 안에 있었으며, 일상적인 사생활에까지도 은밀히 분출되었다. 2012년 이번 전시 [a tale of dragon]은 인간이 규정한 사회와 문화 속에서 문제와 혼란을 야기시키는 성과 나약한 인간의 갈등을 [처용설화]를 바탕으로 풀어낸 것이다. 처용은 바람난 아내를 보았는데도 불구하고, 화내거나 괴로워하지 않고 가무(歌舞)로 그러한 상황을 처리하고 있다. 처용의 가무를 관대함을 지닌 사람의 사랑과 호방함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과연 처용의 행위가 성인군자의 아량에서 나온 것일까? 내가 사랑하고 믿었던 사람이 다른 사람과 잠자리를 하고 있는 장면을 눈앞에서 목격했을 때, 춤추고 노래 부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사람이나 될까? 인간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사회·문화적 특수성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수많은 규율을 정하고, 지키기를 스스로 감시한다. 동물적인 본능과 인간적인 이성의 갈등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본능을 이야기할 때, 성의 에너지만큼 강력한 것은 없다. 게다가 성은 동물적으로만 이야기하기에는 너무도 인간적이다. 사랑이라는 복잡·예민한 감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처용은 인간사회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인물이다. 처용의 행위 또한 이해되기 어렵다. 그래서 나는 처용을 순수한 에너지로 보았다. 처용의 순수한 에너지는 인간 사회에서 어떤 작용을 할까? 이 궁금증을 시작으로 3년 동안, 설화 속의 각각의 인물들을 바라보는 관점을 변화·이동시켜 가며 작업했다. 작품 속에서 용은 연꽃이 흐드러진 연못을 헤집고 다닌다. 불교에서 연꽃은 깨달음을 상징한다. 제 꽃잎에는 조금의 더러움도 묻히지 않은 채, 스스로의 몸에서 피고 진다. 그런데 연꽃은 더럽고 축축한 진흙더미에서 핀다. 이 진흙더미로 용이 내려온다. 그리고 전혀 심각하지 않은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여러 상황을 맞이한다. 사실, 성에서 비롯된 여러 문제들이 심각하고 무거워진 것은 인간만의 우월함에서 나온 것 같다. 성의 욕망과 본능은 얼마든지 인간의 이성적 의지로 제어하거나 컨트롤할 수 있다고 믿는 막연한 자신감, 그 자체가 실은 블랙코미디인 것이다. 용은 언제나 그대로 인데, 어느 연못으로 가느냐에 따라 소소하게 혹은 권위적으로 변한다. 그러니 용이 ‘가랑이가 네 개’인 것을 보고 성질이 나서 미쳐 날뛰었는지, 용서하기 위해 스스로 명상하며 치유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놀다 들어온 길에 술 취해 비틀거린 것인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오히려 그 모습을 보는 관찰자들이 심각하다. 그리고는 우아하고 교양 있는 방법으로 결론 내리려 한다. 용이 모든 것을 용서했고, 역신은 도망갔으며, 부인은 아무 잘못 없다고 말이다. 우리는 왜 이렇게 성의 문제에 대해 감추고 포장하려 할까? 사회는 왜 성적 에너지를 자꾸만 억압하고 구속하려 하는가? 정말로 우리의 본능과 순수한 에너지가 우리가 뜻하는 바대로 관리 될 수 있는 것인가? 나는 앞으로도 성의 문제를 연못의 진흙탕 같이 바라보는 사회의 제 문제들을 들여다볼 것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때로는 매우 심각하게, 또 때로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웃으면서 수많은 질문들을 내 앞에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답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 아마도 나의 작업이 될 것이다. ◆